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해군에 입대하고 이리저리 부대를 옮겨 다니느라 낯선 부대에서 적응을 반복했다. 분명 훈련소 때는 낯가림도 심하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도 잘 못했지만, 이제는 나를 과감하게 먼저 드러내고 다가가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 부대를 빈번히 이동하여 생활한 덕분에 낯선 세계의 규칙에 빨리 적응하는 법을 깨달았다. 어제 처장님과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 당직실로 찾아갔다. 내게 군대에서의 좋았던 기억과 나빴던 기억 모두 가지고 사회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만약 좋은 기억만 가져간다면 추억은 있어도 배움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해군을 ‘선택’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선택’이라는 단어는 내가 주체적으로 실행한 행동의 결과까지도 책임을 진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군에 온 것을 후회했던 적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현실을 온전히 직면하기를 선택했다. . . 가장 힘들었던 것은’나에게 주어진 일은 일단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매일 칠흙같은 어둠속, 칼바람이 부는 바다 위에서 고독함과 싸우는 일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출동 임무가 있을 때면 멀미를 하느라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경계 근무를 성실히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임들에게 거짓말을 했던 철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잠에 들기 전, 미숙했던 내 일병 시절의 모습들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스스로가 한심하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시키는 일을 한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찮은 일처럼 보이는 일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실제 전투 상황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후임을 처음 보면 하찮은 일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제초, 제설, 심지어 화장실 청소 따위의 하찮은 일이라도 꾸준히 성실하게 임하는 태도는 보기 드물다. 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걸 내가 왜 해야 하지?”라고 생각하며 다른 후임에게 떠넘기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진급을 하면 차이는 더 눈에 띄게 벌어진다. 작은 일도 성실하게 해낸 군인은 후임들과 간부들에 인정과 존경을 받고 배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을 맡게 된다. .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알게 된 강기영 배우는 처음부터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광고 모델‘이었다. 유퀴즈에서 그는 배우를 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계속해서 단역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찮은 일로 여기지 않았다. 단역에서 대사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100번의 연습은 기본이었다. 그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연기했다. 수많은 광고 촬영 현장에서 애드리브가 지금의 배우 강기영을 만들었다며 오히려 다행이라고 한다. 만약 그가 광고 모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현재 그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경험에도 배움은 있다. 그러나 원치 않은 경험을 배움이라고 인식하기 위해서, 고통과 온전히 마주해야 한다. 이것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네잎클로버를, 넘어졌을 때 바로 눈앞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절망적인 동시에 희망적이다.